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령황후 송씨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영제 건녕 3년에 간택되고 액정으로 입궁하여 귀인이 되었으며, 다음해에 황후로 세워졌다. 아버지 [[송풍]]은 집금오(執金吾)로 임명되고 불기향후(不其鄉侯)로 봉해졌다. 황후는 영제의 총애를 받지 못해 그저 황후의 지위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고, 실제로 총애받는 여러 후궁들에게 참소를 당하고 있었다. 당초 중상시(中常侍) [[왕보(후한)|왕보]](王甫)가 당시 환관 중에 실세로서, 황족인 발해왕(勃海王) [[유회#s-1|유리]](劉悝)[* 유회라고도 한다. 선황 [[환제(후한)|환제]]의 [[동생]].]를 참소하여 주살한 일이 있었는데, 발해왕비 송씨도 옥중에서 죽었다. 그런데 발해왕비가 송황후의 고모였다. 이 때문에 왕보는 황후가 고모의 일로 원망을 품고 자신을 해치리라 생각해서 선수를 쳤다. 황후가 저주를 행하고 있다고 모함한 것이다. 영제는 이 모함을 신뢰하였고, 광화 원년에 책서를 내려 황후의 새수(璽綬)를 거두니 스스로 폭실(暴室)[* 궁정 내 감옥이다.]로 가 있다가 걱정 속에 병이 나서 사망하였고, 아버지와 형제 모두 연좌되어 주살되었다. 참고로 이 때 [[조조]]의 친척도 연루되어 억울하게 처형당하며 조조는 관직에서 쫒겨났고 조조가 한실에 대해 충성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니냐는 [[https://mkan.china.com/article/1175368.html&|추측]]이 있다. 궁에서 황후를 가까이 시봉하였던 상시와 소황문들은 모두 송황후와 그 가문이 무고하게 희생된 것을 가련히 여겨, 십시일반으로 재물을 각출하여 장사지내 주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